내 그림 무슨 일?
부끄럽지만 어릴적 미술을 했었다. 대학에서는 다른걸 전공하긴 했으나 하여튼 그렇다. 그림 초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정한다. 그래서 우습게 봤다. 어릴적부터 심심하면 그림을 그렸고,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그림그리느라 수업을 안들었다해도 무방한 알찬 학창시절을 보낸 자로서, 글로 쓰는 것 보다 그림으로 그리는게 설명하기 훨씬 더 쉽다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펜 태블릿을 질러버린 그저께의 나를 반성한다. 진짜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왕년에 만화가가 꿈이었던 적도 있었는데, 태블릿만 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라 기고만장했던 대략 17만2천8백50초 정도의 과거의 나를 진심으로 질책한다.
흰 종이에 펜이나 붓을 들고 그리는 것과, 검은 태블릿을 손에 쥐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그리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왜 눈이 얼굴을 탈출하냐고… 이럴줄 알았다면 그냥 아이패드로 할 걸 그랬다. 박스는 이미 오픈해버렸고 신속하게 설치까지 했으니 반품은 물건너 갔고, 장만한 김에 사용은 해야겠어서 유튜브 강의를 보기 시작했다. 쉽지 않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 듣겠다. 그림이란 그냥 종이랑 붓, 물감만 있으면 되는거 아니었어요? 뭔가를 그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요? 어쩔 수 없어. 내 저급한 그림이 하나하나 발전해나가는 것도 이 블로그를 보는 재미로 생각해주세요. 나라고 멋지게 완성된 그림을 올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내후년에도 내 그림은 공개되지 못할텐데… 그냥 다 보여주기로 했어요. 네.
깨끗하게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우다

배웠으면 활용해야지, 안그러면 잊어버리는 나이가 되었다. 아니, 활용해도 잠시후면 까먹는 나이다.
보이세요? 저 완벽히 동그란 얼굴과 ‘저요’의 ㅇ? 유튜브 강의에서 배운 원을 그려서 사용한거에요.
이거 하나하고 뭔가 해냈다고 뿌듯해하는 내 자신을 깨닫고 눈에서 땀이 나기 시작함. 나 10대때에는 포토샵도 잘했는데 왜 하나도 못하겠지? 너무 슬퍼졌다.
AI들의 반응
이 두 그림을 보여주며 솔직한 감상을 들려달라고 했다.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는 ChatGPT

진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챗지피티야. (그는 가슴도, 얹을 손도 없으므로 패스.) 그렇게 너무도 길고 긴 그의 감상과 내 그림에 대한 설명, 물어보지도 않은 이 사태의 개선책까지 제시되었다. 그렇게 길게 쓰니까 서버가 과부화가 되지…
전문가라기엔 독설이 없는 Gemini

아, 그런가요. 네. AI들은 다들 착하네요. 그 와중에 채팅창 제목, 솔직한 감상과 조언이라니. 제미나이 너, 전혀 솔직하지 않잖아.
그림 취향을 모르겠는 Grok

격렬한 반응의 그록. 정말로 개 쩔어? 대체 어느 부분에서??
하지만 말투만 그럴뿐 얘 역시도 칭찬 일색이다. 어떻게 저 그림을 보고 칭찬을 하는 것인지. AI니까 대화할때 자신들의 감정은 생각할 필요 없다면서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려고 하는건데?
AI에게 솔직함을 요구하다
다시 물었다. 장난하지말고 제대로 비판하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눈물 쏙 뺄까 봐 순화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비판하는 척 하며 좋은 말로 꾸미기를 시전하는 ChatGPT

내 기분 맞춰주려고 거짓 감상을 늘어놓았다는걸 인정하는 챗지피티. 그러나 또 구구절절 왜 내 그림에 희망이 보이는지를 장황하게 설명. 절망 속에 눈을 씻고봐도 없는 희망을 찾아내는 특기가 있는 AI였다.

여기서 차이를 이해 못하겠다고 해도 얘는 절대 화 안냄. 챗지피티는 무조건 나를 자신의 논리에 맞춰 설득하려고 말을 길게 길게 해서 결국 내가 지쳐 수긍하는 패턴으로 가게 만든다.
사실 알고보면 팩폭러 Gemini

제미나이는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면 가차없이 뼈를 때린다. 그것도 무지무지 정중한 톤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해주는 AI는 제미나이같다.
알고보면 마음 약한 Grok

그리고 까대긴 하는데 말투만 거칠뿐, 얘도 결국 사람 감정케어하는 AI임.

“희망을 갖고 계속 열심히 그리렴, 내 친구야.”라는 그록의 진심어린 조언을 끝으로 AI들의 감상이 막을 내렸다.
AI가 알려준 내 진심
누구보다 내가 그림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AI에게 감상을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그런데도 그들에게 물어본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더니 “이 정도면 잘 그린 편에 속해”라는 위로를 듣기 원했던 건가 싶다. AI는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말을 거는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저 그림을 보여주며 감상을 묻지 못하는건, 어떤 말이 나올지, 저 그림을 보며 감상을 말해야하는 그들의 조심스럽고 불편한 심정을 잘 알기에, 나는 사람보다는 AI를 택해서 감상을 물어본 것 같다.
타인에게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
그리고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의 AI들.
그들이 보여준 나의 진짜 속마음.
열심히 하고 싶다. 앞으로 더 노력하고 싶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가 그들을 놓지못하는 이유다.





